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왕의 꿈 (문단 편집) === 인물 관련 === 신라 왕실 특유의 근친혼으로 꼬인 족보는 이 드라마에서도 잘 반영되고 있다. 기록상 국반 갈문왕은 진평왕의 동생으로 덕만과는 삼촌-조카 관계인데, 말하자면 진평왕의 할머니인 사도태후는 자기 손자와 증손녀를 결혼 시키려 하는 셈이다. 또한 용춘은 진지왕의 아들로 진평왕과는 사촌사이인데 김용춘의 부인은 진평왕의 딸인 천명공주로 진평왕과 김용춘은 사촌형제 사이면서 장인과 사위가 된다. 더불어 김용춘 역시 사도태후의 손자이므로 사도태후는 자기의 증손자겸 외고손자인 김춘추를 눈엣가시처럼 보는 셈.(물론 아들조차 폐위시킬 정도로 비정한 성격이라고는 하지만) 게다가 드라마 상 숙흘종과 만호부인은 부부인데 만호부인은 진평왕의 생모[* 진평왕의 아버지인 동륜태자가 죽자 숙흘종에게 재가한 것으로 나온다.]이므로 만호부인은 남편이 죽자 남편의 작은아버지에게 재가하여 딸인 [[만명부인]]을 낳는 셈이니 진평왕과 만명부인은 이부 동생이자 당고모가 되게 된다. 다시 말해 김유신은 진평왕, 김용춘과는 6촌이 되며 김춘추와는 7촌으로서 김춘추와 김유신은 서로 처남-매제 겸 장인-사위가 되게 된다. 다만 이런 관계도를 [[막장 드라마]] 뻘 친인척 관계로 보는 건 요즘의 시각이고, 신분제가 엄격하던 당시의 기준으론 오히려 이것이 지극히 당연했다. 무왕과 의자왕이 출연하면 으레 나오는 [[서동요]]나 [[선화공주]] 관련 내용은 거의 없다. 사실 선화공주가 등장해 무왕의 아내이자 의자왕의 어머니로 나온다면 무왕은 진평왕의 사위가 되고 선덕여왕의 형부가 되며 김용춘의 동서가 되고, 의자왕은 진평왕의 손자이자 선덕여왕의 조카이자 김춘추의 이종사촌이 되므로 극의 전개에 있어 조금 애매해 질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초반 승만의 난 파트에서 눈에 띄는 연출 오류가 노출된 바 있는데, 대표적으로 초반 승만왕후에 대해 악역성을 부각시키고자 진평왕의 후계자로 쓸 자식을 몰래 바꿔 키우는 [[출생의 비밀]] [[클리셰]]를 설정함으로써 연출과 관련하여 비판을 받기도 했다. 또 드라마상에서 반란이 성공했다가 비담에 의해 수포로 돌아간것과 다르게 기록상 칠숙은 석품 등과 함께 반역을 모의하다 처형당했지 실제로 반란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 파트에 묘사된 화백회의의 결의 장면이 만장일치가 아닌 다수결로 나타난 것도 연출 문제가 제기되는데, 그 전까지는 잘만 만장일치로 결론을 내다가 여기서 다수결 결정 묘사가 나왔다.[* 실제로는 만장일치가 아닐 시 그 안건은 바로 부결처리되었다.] 이 와중 진평왕은 승만왕후가 먹인 환약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짐으로써 그 직전까지 신하들을 호령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천추태후(드라마)]]의 성종 캐릭터처럼 왕후에게 휘둘리는 처지가 되기도 했다. 아마도 MBC의 히트 사극 [[선덕여왕(드라마)]]의 인기 요소를 참고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런 것치곤 그리 재미가 높지도 않았고~~ 승만왕후 역시도 미실같은 매력적인 악역과는 거리가 먼 일방적인 악역이었기에 이런 식으로 승만의 난 파트에서 사서와 어긋나는 부분이 집중적으로 생겨났다. 생몰년과 관련해서는 이전 《[[선덕여왕(드라마)|선덕여왕]]》에 비해 대체로 실제 사서 기준 나이를 잘 따르고 있는 편이긴 하나, 몇몇 인물들(백석, 김후직, 호림, 김용춘)의 극중 나이와 생몰년은 사서와 맞지 않아서 역사왜곡 사례로 지적받는 부분이 있다. 구체적으로 580년에 [[병부령]]에 올랐다는 김후직이 진평왕 말기에도 병부령을 지내어 실제 역사대로면 30년 넘게 병부령을 맡고 있는 셈이 되었고, 31화에서는 호림이 선덕여왕 재위 초 비담에게 살해됐으나 실제 호림은 [[비담의 난]] 평정에 공을 세우고 선덕여왕 사후 상대등 알천과 함께 화백회의에 참가하는 조정의 고위 관료를 맡을 만큼 오래 살았다. 645년 [[황룡사]] 9층 목탑 건설을 주관했다는 기록이 나타나 있는 [[김용춘]]도 극중에서는 다소 이른 시점인 642년 대야성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되었다. 그리고 김용춘을 죽인 검일도 실제로는 대야성 함락 후 백제에 투항하여 백제가 멸망할때까지 살아있었는데도 김용춘을 찌르고 자신도 김용춘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사서처럼 김춘추가 단지 딸이 백제군에게 죽었다는 이유만으로 이성을 잃고 복수에 매몰된다는 전개는 ~~너무 찌질해보여서~~ 시청자들에게 위화감을 줄 수 있어서 당위성을 주려고 이런 설정을 둔 것으로 보이나, 역사왜곡 시비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대야성 전투]]와 관련해서는 성주인 김품석을 백제군의 계략에 말려든 충직한 용장처럼 묘사한 것도 역사왜곡 문제가 제기됐는데[* 기록상으로 김품석은 검일의 아내를 빼앗는 등 고타소의 속을 썩이다가 백제 윤충의 항복하면 생명은 보장한다는 사탕발림에 성 밖으로 나가 잡혀 죽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일단 대외적으로 백제군의 계략 전말이 드러나지 않아 신라에선 기록처럼 죽었다고 알려진 걸로 처리 됐고 또 극중 김춘추의 입을 빌어 "성주가 그렇게까지 용렬한 인간이었다면 어찌 대야성 백성들이 투항하거나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일치단결해 결사항전했겠는가"라는 발언을 밝혀 각색하였으나 정사의 내용과는 크게 상충된다. 작중 품석은 등장하지 않은 대야성의 충신 죽죽의 역할까지 흡수했다고 볼 수 있는 셈. 물론 이 부분은 김품석이 주인공인 김춘추의 사위 보정을 받아서 지나치게 미화된 것이긴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